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,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.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금양장리 전투 (문단 편집) == 151고지를 탈환하라 == 하지만 이들이 금양장리에 도달했을 때, 마을 인근의 151고지에 의외로 많은 중공군이 잘 구축된 원형 방어진지 안에 웅거하고 있음을 알게 되었다. 화력지원이 부족한 중공군으로서는 보기 드물게도 고지 내부에는 [[박격포]]가 배치돼 있어, 튀르키예 여단은 이들을 연대 규모로 추측하고 이의 소탕을 위해 항공지원을 요청하는 한편, 25사단으로부터 전차를 지원받아 151고지에 대한 전면 공세에 나섰다. 그런데 당시 튀르키예 여단은 앞선 [[개천시|군우리]] 전투([[청천강]] [[사수]] 전투의 일환)에서 비록 병사 개개인의 용맹성은 입증했고 부대 또한 그럭저럭 잘 싸운 편이었으나 예하 일부 부대가 명령 없이 철수하는 등[* 그 외에도 비슷한 시기 [[대한민국 국군|한국군]]과 비슷한 추태, 그러니까 부대 지휘체계가 부분 와해되면서 적지 않은 병사가 행방불명이 되는 등의 사태도 있었다. 게다가 이 상실 병력 중 상당수는 적중에 남겨졌다가 자력으로 아군 전선에 복귀한 것도 당시의 한국군과 비슷한 모습이었다.]의 불미스러운 사태로 부대의 명예가 크게 실추된 상태였다. 이에 명예 회복의 기회가 왔다고 여긴 튀르키예 여단은 여단장 [[타흐신 야즈즈]] [[준장]][* 1892년생으로 오스만 제국 때인 1912년에 육군 소위로 임관, 1차 세계대전에 참전하여 [[갈리폴리 전투]] 때 무훈을 세운 고참 장교였다.] 이하 전 장병이 잔뜩 독이 오른 상태였다. 특히 [[개천시|군우리]] 전투에서 명령 없이 철수한 부대였던 튀르키예 여단 예하 241보병연대 제3대대는 대대장 뤼트피 비글린 [[중령]] 이하 총원이 이 151고지 공격의 선두에 서기를 자청했고, 결국 151고지 공격은 사실상 3대대 거의 단독으로 항공공격 직후 전차대의 후방 직접지원사격을 받으며 맹렬한 고지 돌격 양상으로 전개되었다.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-BY-NC-SA 2.0 KR으로 배포하고,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.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.캡챠저장미리보기